53화. 나 썼어

53화. 나 썼어
희원이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연필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치료실은 조용했다. 선생님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나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난 번에 70까지 썼고, 오늘 다시 이어서 시작한 참이었다. 71, 72, 73. 아이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등을 바라봤다. 작은 등이 살짝 굽어있었다. 온 신경이 연필 끝에 모여 있는 듯했다. 80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숫자를 세고 있었다. 76, 77, 78.
그리고 희원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썼어!"
선생님과 나는 동시에 아이를 봤다. 희원이는 연필을 내려놓고 두 손을 약간 벌린 채 서 있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기쁨이라기보다 더 큰 무언가였다. 세상을 향해 알리는 목소리였다.
종이를 봤다. 80이었다.
목표는 100이었다. 아이가 처음 선언했던 숫자는 분명히 백이었다. 그런데 80에서 아이는 일어났다. 틀린 것이 아니었다. 80까지 쓰는 것이 지금의 희원이가 오늘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아이는 그것을 해낸 것이었다.
"나 썼어!"
다시 한번 외쳤다. 선생님이 크게 웃으며 "맞아, 희원이 썼어!"라고 받아줬다. 나는 박수를 쳤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렸다.
생각해보면, 선언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내가 했다고 세상에 알리는 것. 아이들이 처음부터 그걸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 기쁨을 느끼는 것과,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는 것은 서로 다른 능력이다. 성취를 나누고 싶다는 감각. 내가 한 일을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그것이 관계의 시작이다.
희원이가 오늘 그것을 했다.
100이 아니어도 됐다. 80이어도 충분했다. 아니, 80이었기 때문에 더 진짜였는지도 몰랐다. 100을 다 채우고 당연하다는 듯 덮었다면 이 선언이 나왔을까. 80이라는 숫자, 오늘의 마지막 힘을 다해 쓴 숫자였기 때문에 아이가 일어나 외쳤을 것이다.
"나 썼어."
나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완전한 문장은 아니었다. 주어와 서술어만 있는 두 단어짜리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두 단어 안에 담긴 것은 너무 많았다. 내가 해냈다는 것. 네가 봐줬으면 한다는 것. 오늘 이 자리에 있었던 모든 것.
집으로 오는 길에 희원이는 "나 썼어"를 세 번 더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 주차장에서 한 번, 차 안에서 또 한 번. 그때마다 나는 "응, 썼어. 희원이가 썼어"라고 대답했다. 몇 번을 들어도 그 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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