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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익명· 2026년 6월 9일

56화. 내 이름

56화. 내 이름

56화. 내 이름

연습장 첫 장이 이미 가득 찼다. 삐뚤빼뚤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눌러쓴 한 글자 한 글자. 가만 들여다보니 모두 같은 이름이었다. 제 이름. 아이는 몇 주째 자기 이름만 썼다. 받침이 있는 글자는 아직 낯선지 자꾸 한쪽으로 기울었지만, 이름 석 자만큼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디서든 꺼내 썼다. 이름표에도, 스케치북 귀퉁이에도, 심지어 창문에 맺힌 물기 위에도.

어느 저녁이었다. 아이가 연습장을 들고 내 서재로 왔다. 아무 말 없이 연필을 쥐더니 종이를 내려다봤다. 한참 후 천천히 썼다. 아빠. 두 글자. 삐뚤어도 좋았다. 그다음 엄마. 그다음 누나 이름. 한 글자씩 혀를 살짝 내밀며 집중하는 얼굴이 우습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다 쓰고 나서 연습장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아빠." 그 한 마디뿐이었지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봐, 내가 썼어.

이름을 쓴다는 것. 처음에는 그냥 글씨 연습이라고 생각했다. 획 순서를 익히고, 손 힘을 조절하고, 네모 칸 안에 글자를 맞추는 기술적인 훈련. 그런데 아이가 가족의 이름을 쓰는 걸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름을 쓰는 건 기억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손으로 확인하는 행위. 아이는 지금 자기가 속한 세계를 종이 위에 옮기고 있었다.

ASD 아이들은 흔히 자기중심적이라고들 말한다.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느리다고도 한다. 그러니 이 장면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치료 현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이가 누나의 이름을 쓸 줄 안다는 것. 그것은 누나가 자기 세계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아빠와 엄마의 이름을 쓸 줄 안다는 것은, 우리를 제 삶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연습장 한 장에 네 개의 이름이 나란히 놓였다. 아이는 자기 이름을 맨 마지막에 썼다. 가족의 이름을 다 쓰고 나서야,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래 그 장면을 바라봤다. 가족이라는 첫 번째 사회. 그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아이. 삐뚤빼뚤하지만 분명히, 제 이름을 그 안에 새겨 넣었다.

⚠️ 면책조항 (Disclaimer): 본 웹툰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 형식의 콘텐츠입니다. 특정 치료법의 효과를 보증하지 않으며, 모든 의료적 판단은 반드시 전문 의료진과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별 환자의 치료 결과는 다양할 수 있으며, 본 콘텐츠의 사례가 일반적인 치료 결과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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