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역할놀이

44화. 역할놀이
치료실 한쪽에 작은 선반이 있다. 그 위에는 장난감 청진기, 주사기, 약병 모형, 반창고, 그리고 작은 흰 가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매일 치료실에 들어갈 때마다 그 선반을 보지만, 오늘은 아이가 먼저 그 앞에 서 있었다.
2월의 어느 오후. 진료가 없던 날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논문을 읽고 있었는데, 아이가 선반에서 장난감 청진기를 꺼내 내게 다가왔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댔다. 그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웃음이 나오려다 멈췄다.
"아빠, 아파?"
나는 하던 일을 모두 멈췄다. "응, 배가 좀 아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장난감 주사기를 가져왔다. 내 팔에 '주사'를 놓는 시늉을 했다. 눈을 감는 흉내도 냈다. 주사 맞을 때마다 눈을 감던,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의사 놀이. 역할놀이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아이는 병원을 수십 번 다녔다. 채혈실, 주사실, 치료실. 그 공간들이 아이의 기억 어딘가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것을 놀이로 꺼냈다. 두려움이 아닌, 놀이로. 상징 놀이는 발달의 신호다. 의사로서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아이가 현실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다른 형태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 인지와 언어와 사회성이 동시에 작동하는 순간이다.
"다 했어." 아이가 말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웃었다.
"고마워, 선생님."
아이가 활짝 웃었다. 칭찬을 받은 것처럼, 혹은 해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치료실 선반 위의 장난감들은 그렇게 아이의 세상 속에서 진짜 도구가 되고 있었다.
나는 그날 저녁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 주사 놔줬어, 얘가." 아내가 잠시 멈추더니 눈물을 닦았다. 우리는 왜 우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울음이 있다. 치료실 선반 위의 작은 가운보다 더 하얀 희망이, 그날 저녁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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