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빠랑 버스 타고 갔어

48화. 아빠랑 버스 타고 갔어
버스를 탄 건 지난주였다.
희원이가 버스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주말에 특별히 목적지 없이 한 정거장만 탔다 내렸다. 창문 자리에 앉아서 바깥을 내다보는 희원이 표정이 좋았다. 버스 바퀴 돌아가는 걸 보려고 목을 빼던 모습도 기억난다. 별거 아닌 외출이었다. 기록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뒤, 외할머니가 전화를 했다. 희원이는 할머니 전화를 좋아한다기보다, 전화기 자체를 신기하게 여겼다. 아내가 먼저 받아서 잠깐 통화하다가 희원이한테 건넸다. 나는 옆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자연스레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가 물었다. "희원아, 요즘 뭐 했어?"
나는 가만히 있었다. 희원이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보통은 전화기를 빤히 보다가 내려놓거나, 아내가 얼른 받아서 대신 대답해줬다. 이건 단순한 발화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불러내고,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말로 전달하는 것. 여러 단계가 한꺼번에 작동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희원이가 말했다.
"아빠랑 버스 타고 갔어."
나는 하던 걸 멈췄다.
아빠랑. 버스 타고. 갔어. 주어가 있고, 수단이 있고, 동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이 향한 곳은 할머니였다. 그 자리에 없던 사람에게, 며칠 전의 일을 말로 꺼낸 거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희원이 뒤통수를 봤다.
기억을 저장하고, 그것을 불러내고, 단어들을 연결해 문장으로 만들고, 그 문장을 지금 이 대화 상황에 맞게 꺼내는 것. 이게 한 번에 다 일어나야 한다. 희원이가 그걸 했다. 할머니가 물었고, 아이가 대답했다. 버스를 탔던 그날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언어로 만들어서,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건넸다.
할머니가 "어, 그래? 버스 탔어?" 하고 되물었다. 희원이는 잠깐 있다가 전화기를 내려놨다. 거기서 대화는 끝났다. 주고받은 게 두 마디가 전부였다. 그래도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다시 받아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희원이 쪽으로 가서 옆에 앉았다. 희원이는 이미 다른 데 관심이 가 있었다. 자동차 장난감을 굴리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을 기억이나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희원아."
불렀다. 희원이가 잠깐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잘했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그냥 보고 싶었다. 이 얼굴을. 방금 할머니한테 지난 주말 이야기를 꺼낸 이 얼굴을.
경험이 언어가 됐다. 언어가 관계를 건넜다. 버스를 탔던 그 시간이, 며칠 뒤 할머니에게 닿았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아이가 다시 장난감으로 눈을 돌릴 때까지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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