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한 해를 보내며

42화. 한 해를 보내며
연말이 되면 진료실에는 유독 종이가 많아진다. 보험 청구 서류, 연간 진료 요약, 각종 검사 결과지. 한 해 동안 쌓인 종이들이 책상 위에서 산을 이룬다. 나는 그 종이 더미 속에서 우리 아이의 차트 한 권을 꺼냈다. 다른 환자들의 기록과는 다르게 만져지는 두께였다. 12월 31일 밤, 아이가 잠든 뒤 나는 올 한 해의 의무기록을 펼쳤다.
혈액검사(CBC) 12회. 해독주사 27회. 면역주사 병행. 줄기세포 치료 1~6차 완료. 언어치료, 감각통합치료, 인지치료. 서류상으로는 정연하고 조용하다. 하지만 그 숫자들 뒤에 있는 것들—아이가 울던 아침들, 내가 혼자 운전하며 삼켰던 것들—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종이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숫자 하나하나가 어떤 하루였는지를.
수치를 들여다봤다. 연초와 비교하면 혈구 수치는 안정됐다. 염증 지표도 내려왔다. 줄기세포 6차 이후 아이의 몸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언어는 단어에서 두 단어 조합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눈 맞춤이 길어졌다.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는 빈도가 높아졌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있다.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더 좋은 치료가 있었다면. 3월에 줄기세포를 쉬었던 두 달이 아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의사이지만 내 아이 앞에선 늘 무력했다. 지식이 많을수록 모르는 것이 더 크게 보이는 법이다.
아내가 방에서 나왔다. "아직도 차트 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옆에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같은 해를 살았으니까.
자정이 가까워지자 아이 방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잠결에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였다.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여몄다. 연말의 종이 더미 너머로, 이 아이가 살아있고 자라고 있고 나를 부른다. 한 해가 갔다. 우리는 버텼다. 내년에도 버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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